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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야기

20여만원을 점유하고 중병에 걸린 남편을 버린 안해!

세상에는 결혼을 해서 죽을때까지 한평생을 어떤일이 발생하여도 함께하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재난만 봉착하게 되면 뿔뿔이 흩어지는 부부도 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생각과 자신만의 삶을 위하여 도망가는 경우도 있고 두사람이 함께 서로 모순이 생기고 이기심이 생겨 헤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 어떤 경우냐를 막론하고 결혼이라는 자체를 너무 장난처럼 여기고, 진정한 사랑을 하지 않았다는것을 설명해주고있다.

결혼은 단지 하나의 식뿐만이 아닌 의무이고 책임이다. 안해 , 남편 두사람중 한사람이 병에 걸렸다면 남은 한사람은 일심전력으로 대방의 병치료와 간호에 정력을 몰부어야 하고, 그어떤 일이 발생하여도 절때 포기하지 말고,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함께 있어줘야하는게 결혼의 진정한 뜻이고 진실되고 완전한사랑이라고 말할수 있다.

함께 아래의 상세기사를 통하여 재난앞에서 도망간 안해의 사연을 살펴보도록 하자.

( 이상 올린이 입장 )



" 부부는 한 수림속의 새와 같다. 그러나 재난을 만나면 제갈길을 찾아 흩어지는게 부부관계다 . " 라는 속담을 다시한번 증실해주는 사건이 나타났다. 8년전 안휘사람 장용강과 모명사람 심란(가명)은 결혼등록을 하였다. 5년전, 장용강은 요독증에 걸렸다는것이 밝혀졌고 목숨을 유지하려면 부단히 약물과 투석치료를 받아야한다고 진단이 내려졌다.금년 4월 심란은 남편에게 모명고향으로 돌아가서 병치료를 할것을 권유하였고 그뒤 의료비송금을 거부하였다. 6월 장용강은 광주로 돌아왔고 몇번의 다툼끝에 안해는 집을 떠나 " 실종 " 하였고, 함께 사라진것은 20여만원의 저금과 결혼증, 호구부, 신분증 들이였다.

1998년 심강의 모 대학에서 필업한 안휘사람 장용강은 광주 몽강구역에서 모 거리의 보일러공장에서 일했다. 당시 장용강의 월급은 3, 4천원이었다. 2001년 친구의 소개로 27세의 장용강은 직업고중 학력의 25세 모명사람 심란을 알게 되였고 반년간의 연애를 통하여 두사람은 결혼등록을 하였다.

안해 심란은 정기저금을 한다는 이유로 23만원을 자신의 저축통장에 넣었고, 고향의 공기가 좋다는 이유로 남편을 고향으로 가서 병치료를 하게 했으며 남편의 병세가 악화되자 치료비송금을 거부하였다.

결혼1년후 장용강은 련화거리에서 하나의 자그마한 가게를 세맡았고 신문을 팔았다. 그뒤 작은 가게는 음식점으로 업데이트하여 담배, 간단한 료리, 충전카드 등 상품들을 팔았다.

2004년 10월, 고혈압과 두통으로 병원을 찾은 30세의 장용강은 청천벽력의 진단결과를 받게 되였고 그의 병이 이미 신장쇠약으로 부터 요독증에로 전환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뒤 집에서는 매달 2, 3천원의 치료지출이 나왔다. 몸이 허약하여 장용강은 보일러공장의 일을 그만두었고 안해와 함께 음식점을 경영하였다.

2008넌 12월 기존의 보일러 공장이 이사를 하게 되자 장용강에게는 원단위에서 발급한 23만원의 보상금이 차려졌다. 그뿐만아니라 장래 저량의 금액으로 이사집을 판매할수도 있게 되였다. 금년 1월 심란은 저금을 정기저축으로 전환한다는 이유로 20여만원을 자신의 개인저축통장에 옮겼다.

금년 4월 장용강의 병세가 악하되였고 안해는 그더러 안휘 고향으로 가서 한동안 치료를 받아보라고 권유하였다. 주요원인은 그곳의 공기가 좋다는 점이다. 안해의 권유를 받아들인 장용강은 중약과 2000여원을 몸에 지니고 안휘로 돌아가 병치료를 하였다. 그뒤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5월 그는 황산인민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안해는 치료비용송금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때로부터 장용강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6월초 장용강은 어머니와 함께 광주 몽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에 세를 맡았던 가게에는 자물쇠가 꽁꽁 잠겨져있었고 안해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 현재 모명에 있으니 며칠후 돌아갈겠다 " 는 답복을 받았다. 결호 8년동안 장용강은 처가집의 전화번호를 모르는터라 안해의 말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는수없이 그는 다시 부근에서 집을 세맡고 기존의 가게 문을 강제적으로 열고 늙은 어머니와 함께 가게를 보면서 겨우 밥벌이를 하였다.

내가 죽으면 당신은 전부 재산을 가질수 있고 저렴한가격으로 이사집을 판매할수있으니, 하루빨리 내곁으로 돌아와 이혼수속을 밟고 절반재산을 나에게 돌려달라는것이 장용강이 안해에 대한 부탁이였다.

장용강이 강제적으로 음식점 문을 열자 심란은 끝내 나타났다. 장용강은 안해가 더이상 돈을 내놓아 자신의 병을 치료하려 하지 않는다는것을 깨닫고 이혼을 제기하여 재산과 저축금액을 반으로 나누어가지자고 제의하였으나 안해는 줄곧 동의하지 않았다. 이혼으로 인하여 두사람은 크게 다투어 이웃들에게 추악한 모습까지 보였다.

6월 중순의 어느날 음식점 부근의 이웃은 아침 6시좌우 심란이 나타나 음식점내의 비싼 담배와 충전카드 등을 전부 다른곳으로 운수해가는것을 목격하였고 음식점내에는 동전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녀가 보관하고있던 저축통장, 현금, 호구부, 신분증, 결혼증과 음식점의 영업허가증도 전부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는 장용강에게 " 심천으로 갈래요. " 라는 말만 남겨두고 사라졌다.

장용강은 안해의 의도를 명백하게 토로하였다. " 만약 치료비용이 없으면 나는 바로 요독증에 죽게될것이고, 그때면 그녀는 전부의 재산을 소유하게 될것이다. " 라면서 금후의 재산판정에도 안해의 절대적 우세를 설명하였다.

" 이 몇달동안 대학동창생의 2만여원때문에 겨우 몇달을 지탱하여 왔습니다. " 라면서 장용강은 " 저는 안해가 하루빨리 나타나 협의의혼에 동의를 하고 절반재산을 저한테 줄것을 바라고 고향으로 판결한 돈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병치료를 할것을 바라고 있을뿐입니다. " 라고 안해에 대한 간곡한 부탁을 표명하였다.




출처: 큐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