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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야기

100배 되는 금액으로 빚을 갚어 반세기동안의 근심을 던 로인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신용을 지켜야 하고 친구사이에도 성신이라는 단어를 잊지 말아야한다.

일전, 모 지역에서는 당년에 빌린돈 30원때문에 현재 3000원을 갚은 로인이 있어 더욱 신용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되였다.

몇십년전에는 중국사람 매인당 월급이 몇십원씩하였고 일상 생활품은 제일싼것이 몇전정도로 할때임으로 당시의 돈 30원이라면 현재 3000원가치를 한다. 때문에 당년의 몇백원은 현재 몇만원 가치를 소유하고있는것이다.

우리의 윗세대 사람들은 조국의 건설과 부강에 자신의 모든것을 바쳤고 가장 고난스런 생활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가 생활의 역경속에서 지금까지 견지하여 행복한 노년생활을 보내고있다.

함게 아래의 상세기사로 구체적인 사연을 살펴보도록 하자.

( 이상 올린이 입장 )


여옥토와 정장뢰는 1955년에 농촌의 한 소학교에서 알게되였다. 그년 가을 22세의 여옥토는 성현사범에서 갖 졸업하여 감림옥예소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월급은 35원이다. 25세의 정장뢰는 학교에서 일상관리를 책임지고있었다.

가족의 우질적인 생활을 위하여 정장뢰는 국가의 호응에 맞추어 녕하에가서 변경지원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각지에서는 " 녕하는 아주 좋은 곳이야. " 라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꿈은 아름답고 현실은 잔혹한것이다. 정장뢰는 녕하로 갈 차비마저 없었던것이다. 그는 도처에서 돈을 구해보았으나 모두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다.

정장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돈을 구해보았다. 길에서 여옥토를 만났고 그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그녀에게 말해주었고 그에게 돈을 빌려줄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금통장을 주면서 돈을 꺼내 쓰라고 통쾌하게 대답하였다.

저금통장속에는 35원이 있었다. 정장뢰는 은행에 가서 30원을 꺼냈다. 돈을 꺼낸후 여옥토와 작별인사도하지 않고 저금통장을 은행담당자에게 준다음 바로 녕하로 가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은행담당자는 그뒤 여옥토에게 저금통장을 돌려주었다.

당시 왜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냐? 는 물음에 정장뢰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당초 그녀에게 빌려달라고 청든 액수는 20원이였으나 정작 꺼낸것은 30원이였다고 작별인사를 할 면목이 없다면서 가만히 " 도망 " 친 원인을 설명하였다. 당시의 청춘혈기로 벅찬 정장뢰는 이행위가 반세기동안의 사상부담으로 될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녕하에 도착한후 정장뢰는 바로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였고 매달 45원의 월급을 받게되였다. 첫달의 월급을 받은후 그는 여옥토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냈고 편지와함께 하나의 만년필도 보냈다. 당시 여옥토도 그에게 답변편지를 보냈고 상호 격려하여 공통진보를 취득하였다.

정장뢰는 첫달의 월급을 받은후 일부를 고향의 집으로 보냈다. 얼마되지 않아 마을에서는 그가 녕하에서 큰돈을 번다는 소문이 퍼져 고향사람들은 모두 녕하로 와서 그와 함께 동업하였다. 사람이 많아지자 일상지출이 많아졌고 집에 돈까지 부쳐야 함으로 그의 생활은 바로 곤경에 빠졌다.

정장뢰는 그뒤 지방정부의 요구에 따라 반복적인 고민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뒤의 몇십년래 가정을위해 그의 생활은 줄곧 가난속에서 허덕였고 돈을 갚을 능력이 없어 줄곧 마음속깊은 부담으로 되였으며 비록 주동적으로 여옥토와 연락을 취하지 않았지만 줄곧 빚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고 있었다.

몇년전 아들의 보살핌속에서 정장뢰의 생활은 점차 좋아졌다.

작년 그는 여옥토일가가 승주시감림진 동산촌에 살고있다는 소식을 접한후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하였던 빚을 갚기로 결정하였던것이다.

정장뢰는 아들이 아주 효성스러워 자기에게 주는 생활비가 몇백원이나 되여 안락한 노년생활을 보내게 되였다며 토로하였다. 빚을 갚기 위하여 그는 매달 일부분의 생활비용을 절약하여 전번달까지 3000원을 모아 당년의 은인에게 이 특수한 " 은혜 " 를 갚았다.

정장뢰는 " 일푼의 돈이 영웅에게 막심한 고난이 될수있습니다. 당년 여옥토는 저에게 돈을 빌려주어 저의 은인임으로 이몇년동안의 저의 마음속부담으로 되였으나 지금 이렇게 갚게되는 그제야 해탈의 기분이 듭니다. " 라면서 기쁜마음을 표현하였다.

기자가 왜 3000원을 갚느냐? 는 물음에 그는 황금과 량식비용의 상승폭도를 조사한결과 두자사이의 적중치를 선택하여 1원을 빌리면 100원을 갚는 비례로 자신의 반세기동안의 빚을 갚았다고 토로하였다. 바로 전에 그는 여옥토에게 한장의 3000원 송금서를 보냈다.

" 장뢰동지!! 당신의 방문을 환영하오. " , " 여선생 잘있었소? " 라고 여옥토 집안의 복도에서 두 노인은 서로 손을 마주잡고 호상 대방을 한참동안 주목해 보다가 동시에 " 잘지냈소? " 라고 안부를 물어보았다.

50년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 친구 " 는 수많은 말을 하였고 당년에 돈을 빌린 일에 대하여 두사람은 " 말다툼 " 이 생겼다. 여옥토는 당년에 빌린돈을 갚는것은 중국사람의 성신관념을 체현하였지만 30원만 빌려주었으니 그냥 30원만 받겠다고 고집하였다.

이때 정장뢰는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3000원은 현재와 당년의 생활수준 가격차로 갚는돈이니 어서 받고 자신의 반세기동안의 근심을 덜어달라고 강요하였다. " 속담에 친구와 사귈때 신용이 있어야 하고 사람으로서 성신을 지켜야 하며 지금 이렇게 빚을 갚게 되니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 라면서 정장뢰로인은 감격에 겨워 얘기를 하였다.

그러나 여옥토는 여전히 " 30원만 받겠소 그나머지돈은 다시 당신한테 보낼것이오. " 라면서 " 말다툼 " 을 계속 하였고 두노인사이의 소중한 우정을 표현하였다.




출처: 큐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