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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야기

모주석님의 집사 오련등이 공개한 주석님의 노년생활

요즘 인기를 끌고있는 < 건국대업 > 의 붐을 타고 모주석님에 대한 회억과 추억의 기사들이 많이 뜨고있고 일전, 모 매체에서는 모주석님의 노년생활 집사를 인터뷰하여 주석님의 노년생활의 여러방면을 대외 공개하였다.

주석은 중국의 최고 령도자로서 수많은 인민들의 기대와 미래를 짊어지고있으며 그들의 일상생활은 어떠하였을까?

중국의 역사는 수많은 선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면 바로 중국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모주석과 그의 동년배 국가 위인들이라고 볼수있다.

함께 아래의 상세기사로 모주석님의 노년생활을 살펴보도록 하자.

( 이상 올린이 입장 )


노년의 모주석님은 한명의 집사 ---- 오련등을 두었다. 그는 모주석님을 배동하여 1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고 1976년 9월 모주석님이 세상을 뜨자 집사를 그만두었다. 당일, 오련등은 길림시로 방문왔고 처음으로 성취재팀의 인터뷰를 받고 모주석님의 노년생활을 공개하였다.

어제 오후 3시경 기자는 길림시에서 오련등을 만났고 노인님은 69세이고 키가 크지 않지만 아직도 끌끌한 매력을 보였다.

오련등은 : " 내가 3년전에 길림시에 왔을때보다는 아주 큰 발전을 가져왔군요... 이곳의 입쌀은 참으로 맛있네요. 다음번에 길림시에 올때에는 겨울철이면 좋겠어요 겨울옷을 입은 소나무를 보고싶네요. " 라면서 계절의 못마땅함을 아쉬워했다.

1958년 오련등은 강소성 염성지위초대소에서 복무원직을 하였다. 1959년, 인민대회당이 건설되였고 전국각지에서 복무원을 초빙하여 염성에 떨어진 하나의 지표에 오련등이 선정되였던것이다.

1964년 국경절, 모주석님 신변의 호사장은 오련등을 찾아왔고 그를 안내하여 모주석님을 만나뵙게 하였다.

" 제가 주석님을 처음 보았을때 긴장에 많이 떨렸고 주석님이 < 나는 당신과 한가지 일을 상의하고 싶네. 우리집에는 아주 많은 일들이 당신의 관리가 필요하오. 나는 당신의 도움을 청하고 싶소. > 라고 말하는 겸손한 어조에 많이 놀랐습니다. " 라고 오련등은 처음 모주석님과의 만남을 회억하였다.

오련등은 이렇게 모주석님의 집에 들어섰다. " 주석님의 집에 들어서자 그는 딸애 리민, 리나에게 나를 소개시켜주었고 그들더러 나를 아저씨라고 호칭하게 하였습니다. 주석님은 내가 자신의 동사자라고 소개하고 동년배라고 하였으며 딸애들더러 아저씨라고 부르게하였고 지금까지 만나면 아직도 아저씨라고 호칭합니다. " 라고 주석님의 딸애한테서 듣게되는 아저씨의 호칭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다.

오련등의 초기 작업은 위생청소, 창고정리, 밥날라주기 등이였다. 1968년 오련등은 정식으로 모주석님의 집사가되였고 주석님은 자신의 월급을 바로 오련등에게 주었고 집안의 여러가지 지출과 수입도 모두 그가 전부 관리하게 하였다.

오련등은 " 주석님의 집사는 누구나 할수있는것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주석님의 월급이 일상생활비용에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 라고 모주석님의 일상소비금액을 간단하게 소개하였다. 모주석님이 받고있는 월급은 당시 국가 1급월급으로서 610원이고 3년 자연재해를 입은후 자체적으로 3급 월급 404.80 원은 받았고 이 월급은 모주석님이 돌아가실때까지 줄곧 변치않았다고 밝혔다.

오련등은 모주석님의 일상 소비에대하여 아래와 같이 공개하였다. 당비 10원 4합원의 가구는 전부 빌려쓰는것으로 전세비 84원, 두 아이의 학비 원래는 15원이였는데 물가상승으로 30원으로 올았고 음식 100원좌우 담배, 차 100원, 겨울에는 난방비용까지 30여원을 지불하고나면 그외의 친구와의 외식은 거의 월급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 돈이 부족하면 저는 주석님을 찾아갔고 매번 명세장을 들고갔고 그에게 이번달의 지출을 회보하였습니다. 주석님은 " 이번달에 또 돈이 부족하나 보네... " 라고 한마디한다음 저의 보고서에 싸인을 합니다. 나중에 저는 중앙특별회계실에가서 주석님의 투고비용으로 일상에 보태여 쓰곤하였습니다. " 라고 부족한 일상비용을 보상받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 주석님의 경제상황이 이렇게 좋지 않지만 1964년 제가 주석님의 집에간 첫해에 고향에있는 집이 불이나 가산이 탕진당하자 주석님은 바로 300원을 꺼내 저한테 주면서 명령스런 어구로 돈을 받게 윽박질렀고 이는 한평생동안 주석님이 내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되는 명령입니다. " 라고 오련등은 뜻깊은 추억의 한장면을 떠올렸다.

" 주석님의 모든 옷견지는 10여개의 헝겊조각이 붙여져있었고 요즘 방영하는 < 건국대업 > 속의 주석님과 완전 동일한 생활을 하고있습니다. " 라고 강조하였다.

" 주석님의 주식은 일반 4가지 료리와 하나의 탕으로 조합되여있고 하나의 해어료리, 하나의 육류료리, 하나의 반육반숙료리 와 하나의 완전 채소료리로 구성하였으며 전부 제가 결정한것입니다. 민간에 주석님이 매일 훙사오러우 를 드신다고 하는데 이는 지어낸 말들이고 저는 한달동안 한두번 좌우만 주석님에게 대접시킵니다. 주석님은 평소 오곡잡량을 즐겨드시는데 매일 하나의 고구마와 하나의 옥수수를 드십니다. " 라고 주석님의 음식습관을 소개하였다.

" 리민, 리나는 매일 주석님과 함께 밥을 먹을수없고 한주일에 한때정도 먹습니다. 주석님은 < 나의 음식은 인민들이 나의 작업을 위하여 준비해준것으로 너희들과 함께 먹어서는 않된다. > 라면서 음식의 귀중함을 타일렀고 매번 한집식구가 함께 식사를 할때면 주석님은 그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해주고 다음번에 밥먹을때는 전번에 추천한 책을 읽어보았는가 라고 꼭 물어보시곤 하였습니다. " 라고 식사할때의 일들을 덧붙여 설명하였다.

" 저도 모주석님의 방에서 함께 자는데 주석님은 안방에서 저는 거실에서 휴식합니다. 주석님의 노년 신체상황이 좋지 않아 한편으론 주석님을 보살펴줄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불필요한 전화와 방문자를 막기위해서였습니다. " 라고 주석님의 주숙상황을 토로하였다.

" 주석님이 집문을 나서면 모두 전용 자동차가 있고 주석님은 이것이 가장 아쉬운점이라고 늘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주석님은 일반인처럼 바깥출입을 하였으면 좋겠는데 주위환경이 그렇게 허락을 하지 않아 큰 아쉬움이라고 자주 < 투정 > 을 부립니다. " 라고 주석님의 외출상황에 대하여 간단하게 서술하였다.




출처: 큐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