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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야기

신문을 팔아 여동생의 대학비용을 해결하고있는 외짝다리 젊은이 !!

장애자의 정신력은 일반인들과 완연히 다른 수준을 보여준다.

일전, 모 지역에서는 지하철 통로에서 지팡이로 간신몸을 이동하면서 신문가게를 경영하여 여동생의 대학 뒷바라지를 해주는 젊은이가 시민들의 감동을 자아내 매체를 통해 공개되였다.

어릴때 다리하나를 잃고 줄곧 여동생의 학교비용을 해결해주고있는 이 젊은이는 불굴의 정신과 고난에대한 용감한 전투력으로 수많은 시민들의 호감을 가졌다.

일부 시민들은 출근고봉기에도 그의 가게에 들러 신문과 잡지를 구매했고 매일 적어도 300여명의 고정판매를 하고있다고 젊은이는 마음좋은 사람들의 관심에 감사를 표시했다.

친정은 참으로 보귀한것이고 같은 피가 흐르고있는 형제정도 일종 사랑이라고 느껴진다.

함께 아래의 상세기사로 구체적인 사연을 살펴보도록 하자.

( 이상 올린이 입장 )



올해 구정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원인에 대하여 그는 여동생이 대학을 다니는 마지막 해임으로 돈을 더 많이 벌어놓아야한다고 밝혔다.

그에 대하여 늘 림강문지하통로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잘 알것이다. 그가 바로 지팡이로 몸을 이동하면서 신문을 팔고있는 외짝다리 젊은이이다. 그는 장복평이라고 부르고 올해 26세이다.

" 젊은이 , 신문을 주게... " 라면서 출근고봉기임에도 불문하고 장씨의 신문가게앞에는 늘 사람으로 붐빈다. " 당신의 신문입니다. 잘 넣간수하세요, 감사합니다. 내일 다시 봅시다. " 라면서 지팡이를 짚고일어나 고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는 " 서서 고객들에게 신문을 건네는것은 존경의 뜻을 표합니다. " 라고 기자에게 설명하였다.

매일 아침 7시가 되지 않으면 장씨는 신문가게를 여느라 바삐돌아쳤다. 고객이 없을때면 늘 잡지나 서적들을 들고 독서를 하였고 밤늦게 되여서야 가게를 거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생활은 이미 4, 5년동안 지속되였다. 이 모든것은 그의 여동생의 대학생활 뒷바라지를 위해서였다.

그믐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장씨는 자신에게 하루의 휴가를 주어 해방기념비 앞을 거닐었고 밤 12시 종소리가 울리자 눈을 감고 두손을 모아 여동생이 대학필업후 좋은 일자리를 얻기를 빌었다.

" 우리 오누이의 감정은 아주 좋습니다. 여동생의 뒷바라지를 할수 있어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 라고 여동생보다 4살위인 장씨는 얘기하였다.

장씨는 사천성매산시동파구 사람으로서 초중을 다닐때 기차에 다리가 끼워 절제수술을 하였고 그뒤 학교를 그만두었다.

잔페인이 된 장씨는 매일 우울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고 몇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였으나 매번 귀여운 여동생이 곁에서 " 오빠, 오빠... " 라고 부르면서 졸졸 따라다녔기에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마음속이 그늘이 사라진후 그는 중경으로 왔고 그해 그는 여동생의 학비를 부담하기 시작하였다. 중경에서 수많은 고생을 했고 여러 고난을 겪었다. 매번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때면 여동생의 웃는얼굴이 떠올라 다시 분투하게 되였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여동생이 성도의 서화사범대학에 입학한후 그는 더욱 열심히 일했고 매일 두가지 일을 하였다 낮에는 신문을 팔고 저녘에는 야시장에서 일을 하였다. 생활상에서 절약정신을 발휘하여 매일 점심비용을 4원으로 공제하고 매달 여동생에게 생활비용을 맨 처음의 300원으로부터 지금의 500원까지 부쳐주게 되였다.

여동생은 오빠가 자신의 훌륭한 본보기라고 강조하였고 금후 일자리를 찾고 돈을 벌게되면 꼭 오빠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자신이 오빠를 돌보겠다고 밝혔다. 여동생의 마음을 읽은 오빠는 여동생이 일자리를 찾게 되여 독립하게되면 신문가게를 그만두고 사회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햐여 그동안 자신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달한 마음좋은사람들에게 보답하겠다고 다짐하였다.

현재 그는 모 문화교육연습센타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의무봉사활동과 공연 관련 업무에 몸을 바치고 있다.




출처: 큐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