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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야기

독학으로 대학에 입학한 고아 --- 휴가기간 차닦이 일을 하여 생활비용을 마련하는 대학생

항상 위기감을 가진 사람만이 큰 발전을 가져온다는 속담이 있다. 고아의 신분으로 고중 2학년때 학업을 마쳐야 하는 심정을 일반인은 이해하지 못할것이다.

교과서와 강의에만 의거하여 독학을 해야하는 학생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일전, 모 지역에서는 국경절 휴가일에도 차닦이 일로 생활비를 마련하는 대학생 사적이 매체를 통하여 보도되여 수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고 그의 과거에 대한 요해로 사회적인 주목대상으로 되였다.

함께 아래의 상세기사로 고아 대학생의 사연을 살펴보도록 하자.

( 이상 올린이 입장 )


기나긴 8일동안의 휴가기간 대학생들은 모두 여행을 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모이는데 국가급 빈곤현 녕하서길현에서 온 강소대학능동학원의 대2생 장지치는 남경일자동차클럽에서 차닦이로 하루에 60원벌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휴가를 보내고있다.

장지치는 1987년생이고 서길현 하나의 빈곤한 작은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여날때 어머니는 난산으로 세상떴고 5세때 아버지는 우물속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16세나는 누나와 함께 생활을 유지하였고 매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공부를 할수있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이모든것은 장지치의 정서에 영향주지 않았다. 그는 줄곧 학급에서 학습성적이 앞자리를 차지하였고 초중3학년때에는 선생님이 강제적으로 학생들을 숙소에 돌려보냈지만 장지치만은 가만히 다시 교실로 돌아가서 심야 12시까지 공부를 하였다. 일찍 잠자기 싫어서가 아니라 늘 얇은 이불때문에 밤중에 잠을 깨는것이 주요원인으로 되였다. 공부를 12시까지 하면 쉽게 깨나지 않기때문... 공튼탑이 무너지랴? 고 장지치는 그해에 현지에서 가장좋은 고중 서길고중에 입학하게 되였다.

서길고중에 입학할때 장지치는 이미 18세이고 두아이를 가진 누나와 매부는 더는 그의 공부비용을 대줄수가 없게 되였다. 2005년 집에서 가을을 마친후 고1학업을 마친 장지치는 더는 교실에 남아있을수 없게되였다. 그러나 공부를 그만두게 된 이튿날 그는 학교에가서 선생님한테 고2의 교재와 강의를 빌렸다. 그뒤로 막일을 하거나 농사일을 하거나를 막론하고 그는 시간만 나면 독학을 하였다. 2007년과 2008년 그는 사회청년의 신분으로 두차례의 고등시험을 보아 본과선에 도달하였지만 시험을 더욱 잘치러 더 좋은 대학으로 가려는 신념으로 일년동안의 독학을 거쳐 2008년 그는 510점의 훌륭한 성적으로 강소대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2006년 여름방학 장지치는 대담하게 학습보도학원을 창설하고 10원으로 20분의 선전포고를 현성의 곳곳에 붙였다. 그해 여름 그는 9명의 학생을 받았고 집으로가서 분별로 보도해준 결과 2200원이라는 " 거액 " 을 손에 쥐게되였다. 그의 독학능력이 출중하여 그가 보도해준 학생들의 성격은 눈에 띄이게 올라갔다. 그뒤 몇년동안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그의 보도반은 이미 현성의 브랜드 " 학원 " 으로 성장하였다.

장지치는 행운스럽게 강소대학의 여러가지 관심과 도움을 받았다. 대학원에서는 그에게 조학대부금과 여러가지 보조금을 신청해주었고 그와 퇴직선생님 장은숙과 " 새로운 가정 " 을 만들어주어 " 집 " 의 따사로움을 느끼게 하였다. 장지치의 이야기는 수많은 동학들을 감동시켰다. 목전, 그는 교내에서 3가지 일을 하고, 틈마나면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아대학생의 매달 보조금 200원까지 합하면 그의 월수입은 천원가까이된다. 그러나 돈쓰기 아까워하는 그는 " 아직도 너무나 많은 조학대부금을 갚아야 하는데요... " 라면서 근검절약하는 좋은 습관에 < 핑게 > 를 붙였다.

국경절 휴가기간 그의 동학들은 그에게 남경자동차미용원에 " 취직 " 시켜주었다. 그는 기자에게 휴가기간 4, 5 백원 정도 벌수 잇으니 두달동안의 생활비용은 해결된셈이라고 만족의 미소를 보여주었다.




출처: 큐큐뉴스